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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 2011

사순절 이야기(16) – Connecticut의 자연

12월 29일 폭설로 Hartford 행 비행기가 취소되어 뉴욕에서 밤 12시에 택시를 탔다. 그리고 밤 3시쯤 84번 고속도로 68번 출구에서부터 195번을 따라 목사님 차의 안내를 받으며 Storrs로 들어섰다. 캄캄한 195번을 뚫으며 나아가는 헤드라이트의 조명은 미국 생활을 막 시작할 나에게는 마치 연극이 시작될 때 처음 무대를 비추는 조명과도 같았다. 도로 양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은 집들이 간간히 있었을 뿐 대부분 나무들이었다. 나무들은 헤드라이트 빛이 보이지 않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어 직관적으로 이곳이 거대한 숲으로 둘러싸인 시골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Connecticut에 온지 거의 석 달이 지나가는 지금까지 나는 그 캄캄한 밤 195도로에서 가졌던 Storrs에 대한 첫인상이 온전히 옳았음을 거듭 확인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평지보다 좀 높은 곳에 있는데 조금만 멀리 보면 낙엽 진 옅은 갈색의 겨울 숲이 하늘 닿는 데까지 펼쳐진다. 집근처 월마트 앞에서 바라보는 전경도 마찬가지다. Connecticut에서는 어느 도로든 양 옆으로 끝임 없이 숲이 시작되고, 전망이 있는 곳에 이르면 어김없이 눈앞에는 하늘 닿는 데까지 광활한 숲이 펼쳐진다.

20년 전 빠리에서 공부할 때 에펠탑에 올라가서 받았던 깊은 인상은 한 눈에 보이는 빠리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었지만 그보다 천만 인구의 대도시 빠리가 저 멀리 검은 숲에 둘러 싸여 있다는 것이었다. 이 광경은 빠리의 거리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일들이 모두 대자연의 손 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직접적으로 확인시켜주는 듯 했다. 마치 우주인이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볼 때 가졌음직한 인상처럼. 그토록 자연이 아름다운 우리 한국에서는 인간 사회로부터 격리됐다는 느낌을 좀처럼 갖기 힘들다. 대부분이 도시 생활을 하며 시골을 가더라도 사람 냄새가 없는 곳이 없다. 심지어 어느 산을 가더라도 등산로가 뻥뻥 뚫려 있고 아무리 심심산천으로 숨으려 해도 멀리 마을이 보이거나 논밭이 보인다. Connecticut에서는 자연 속에 마을도 만들고 도로도 만들었다는 사실을 일상적으로 깨닫게 해준다. 마을들은 거대한 숲에 싸여있고 도로 옆으로 이어지는 나무들은 인간과 자연의 경계선으로 이 경계선 저편에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두려운 자연의 세계가 시작될 것 같다.

얼마 전 등산매점을 들렸을 때 우연히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Connecticut의 도보 여행 코스들을 소개한 책 “Best Hikes with Kids”을 발견하고는 불현듯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책에 소개된 코스들을 하나씩 주말에 다녀오는 것이다. 책을 사들고 자기 전 침대 위에서 읽으며 즐거운 상상을 했다. 먼저 가깝고 쉬운 곳부터 가봐야지. 아이들이 미리 가기 싫다고 떼를 부리면 어떻게 하나. 텐트도 사고 침낭도 사야지. 아이들이 걸어 다니는 것은 싫어하겠지만 야외에서 버너로 밥해 먹고 텐트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은 좋아할 거야. 잘하면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책에 소개한 곳을 스무 군데 이상 가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멀리서만 바라보던 Connecticut의 숲을 속 깊이 느낄 수 있겠지. 아이들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교육이 없을 거야. 플로리다 디즈니랜드로 여행가는 것보다 이것이 백배는 유익하지.

지난 토요일에 드디어 시작했다. 소개된 것 중 집에서 가장 가깝고 또 하이킹 코스가 2시간 정도로 짧은 곳을 택했다. Rock Spring Preserve라는 곳인데 네비게이터로 집에서 15분이었으니 정말 가깝다. 입구 옆 도로에 차를 주차시키고 책에 소개된 대로 코스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운전할 때마다 도로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숲속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 궁금하면서도 두려운 세계로, Connecticut의 깊숙한 심장부로, 첫 발을 디딘 것이다. 그 세계는 캄캄한 밤 195번 도로를 처음 들어섰을 때 가졌던 Connecticut에 대한 첫인상 그대로였다. 정말 도로 옆 나무들이 바로 인간과 자연의 경계였다. 도입부도 없이 바로 숲이 시작되어 입구부터 하늘높이 빼곡하게 나무들이 가득했다. 숲 속에는 오솔길과 길 표시 정도가 인간의 것일 뿐 자연만이 가득했다. 사람도 거의 없어 3시간 정도 걷는 동안 사람을 단 두 번 만났다. 혼자 왔으면 겁이 날만 했다.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없어 몇 번 헤매기도 했고 지도 없이 저 숲 속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 지기도 했다. 얼마를 더 가니 예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따뜻한 봄 햇살에 아른 거리는 시냇물을 옆에 끼고 한참을 걸었다. 책에는 비버들이 댐을 쌓고 있는 것이 보일 거라고 했지만 보지 못했고 비버가 만들어 놓은 댐과 비버가 밑둥을 갉아 먹어 죽은 나무들은 보았다. 책에는 사슴들이 많이 있다고 했는데 똥들은 여기저기 많이 보였지만 사슴은 보지 못했다. 코스가 끝나갈 무렵 전망대가 있었다. 계속 숲속만 걷다가 갑자기 앞에 광활한 숲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자 우리 가족은 모두 넋을 놓고 탄성을 지었다.

 

첫 시도 치고는 기대 이상이었다. 아이들도 의외로 좋아했다. 힘들겠지만 아이들이 잘 따라주어 계획대로 주말마다 Connecticut의 자연을 마음껏 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나 아이들이나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자연 앞에 보다 겸손해 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욕심을 부려도 자연이 허락하는 정도에서 부려야 한다는 현명함을 지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우리는 자연에서 태어났고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돈이나 편리함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행복이 삶의 목표임을 깨달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9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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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ourorange

    자동차 속도로 자연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걷는 속도로 자연에 들어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가뜩이나 계절이 바뀌면서 조금씩 드러나는 봄의 모습에 가슴이 설레는데… 요번 주말에는 저도 서현이와 낭군님 손을 잡고 걷고 싶네요^^

  2. 영서늬

    큰~~ 지도 펼쳐놓고..
    점 하나 하나 하나 찍고,
    추억 하나 찍고
    행복 둘 찍고,

    지도 둘둘 말아 한국행~~..
    말았던 지도 펼치고…
    추억 하나 생각나고,
    행복 하나 더 늘어나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추억꺼리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3. 기현애비의 프로필 사진
    기현애비

    ㅍ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제주도, 위생병, ㅍ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4. 정인기의 프로필 사진
    정인기

    기현애비님처럼 저도 그곳에서 9년 가까이 살았는데, 그런 건 전혀 몰랐어요.
    그냥 ct.gov 홈페이지 가끔 가서 주의 50군데 명소나 간 정도였지요.
    역시 학생일 때와는 차이가 나나 봅니다. ㅎ(몇 년 후가 기대됩니다.)
    재미있게 좋은 시간을 보내시는 걸 보니 고맙습니다.

    성달이님 말씀처럼 그곳이 옛날에는 엄청 개발열풍으로 몸살을 앓아서
    이제는 오히려 환경주의자의 목소리가 너무 큰 듯 한 때도 가끔 있지요.

    기현애미님의 하드코어 제주도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5. 기현애미의 프로필 사진
    기현애미

    햐…마치 한편의 수필을 읽는 것처럼 정신없이 글을 읽었습니다. 태어날때부터 여기 오기전까지 빌딩숲에만 살았던 저로서는 여기 생활이 얼마나 좋은지. 심지어 이제 큰 도시에 가면 세식구가 차창밖으로 두리번 두리번 거리는 모습이 딱 시골쥐가 된 느낌이랍니다.

    생긴 그대로, 있는 그대로 사는게 참 어려워진 세상입니다. 솔직함은 촌스러움으로, 겸손함은 무능력함으로 인식되는 사회입니다. 건강한 담론은 정치적 논리에 밀리고, 세상은 힘과 돈의 논리에 좌지우지되는 정글이 되었습니다. 돈의 학문이 대우를 받고, 사람의 학문이 천대를 받는 우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참 사는게 재미나다고 생각되는건, 좌충우돌 앞뒤 안가리는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측은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고, 자본의 논리안의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속에 ‘보이지 않는 손’이 여전히 따뜻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나저나 홍교수님의 자연탐방 이야기를 들으며 연상되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각종 하드코어 사건사고가 훅훅훅 떠오르는건….??? ^^

  6. 성달이

    코네티컷포함 뉴잉글랜드지역의 울창한숲은 인간이 자연을 순식간에 파괴할수있지만 또한 얼마나 빨리 복구할수있는지 보여주는 좋은예임다.

    19세기말까지 뉴잉글랜드의 숲은 산업화와 무차별적인 벌채로 우리나라 60년대말이나 현재 북한에 많은지역에서 볼수있는 민둥산처럼 되었었다고 하네요. 유류중심의 난방및 다른종류의 목재수요가 줄어들고 정책적으로 추진한 삼림화계획이 성공한결과가 지금 그곳의풍경이라고 합니다.

  7. 0070

    어쩜 두분다 글을 시적으로 쓰시네요. 빠리효과인가요? ^^;;

  8. 장호준

    Trail을 다녀 오셨군요.
    멋집니다.
    많이 보시고,
    많이 느끼시고,
    많이 담아가십시오.
    곧 이어 메인, 버먼트, 뉴햄프셔…
    커네티컷의 지경을 넘어 뉴잉글랜드로….

  9. 기현애비의 프로필 사진
    기현애비

    커네티컷 생활 햇수로는 6년차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멋진 코스가 있는줄 몰랐네요. 커뮤니티 센터에서 기현애미, 기현애비 단체로 체력보강한 다음에 꼭 도전해볼 코스네요^^ 대자연아래 어우러진 2남1녀의 모습이 넘 부럽다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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