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지울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연필로 쓴 것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지만 잉크로 쓴 것은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지워 지지는 않지만 가릴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잉크로 쓴 것은 지우개로 지울 수는 없지만 화이트-white로 가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지워 지지도 가려 지지도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온 흔적입니다.
쿠데타로 권력을 도둑질하고 무지하고 불의한 폭력으로 입과 귀를 틀어막아 버린다고 하여도, 왜군 장교가 되어 독립군의 가슴에 총질을 했던 박정희의 반민족 흔적은 국립묘지에 묻어 둔다 해도 지울 수도 가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살아온 흔적은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집트 바로 왕의 궁으로 들어섭니다.
목숨을 부지 하고자 도망쳐 나온 곳, 두 번 다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고 온갖 핑계를 대 보지만 마침내 야훼 하나님의 명령 앞에 무릎을 꿇고, 몸서리 쳐지게 두렵고 증오했던 바로의 궁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내 백성을 해방 시켜라!”
예수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섭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 자유가 두려운 제사장, 율법주의자, 바리새파들이 사자같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호구(虎口), 아니 달려들어 물기위해 독이빨을 잔뜩 세우고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독사의 소굴, 사구(蛇口)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칩니다.
“진리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니, 나를 죽여 진리를 찾아라!”
삶의 흔적은 지울 수도, 가릴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모세도 예수도 되돌릴 수 없는 삶의 걸음을 해방과 자유를 위하여 이렇게 내 딛었습니다.
사순절 서른 다섯째 날,
나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되돌릴 수 없는 내 삶의 걸음을 내 딛고 있는지 고개 숙여 물끄러미 발을 내려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