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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 2018

2018 사순절 이야기 – 서른다섯 번째 편지

잠언 25:26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이 흐려짐과 샘이 더러워짐과 같으니라>

본디오 빌라도(Pontius Pīlātus)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로마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점령지 유대에서 AD 26년부터 36년까지 총독을 지냈던 자입니다. 이전에도 총독들이 있었지만 빌라도만이 특별하게 기억 되는 것은 이자가 총독을 지내던 시기에 예수가 사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사형에 처하도록 내어 주고 그는 군중들 앞에서 물을 가져다 손을 씻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그 후 교회는 ‘사도신조’를 통해 지금까지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를 외우고 있지만 빌라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극히 억울하기도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를 죽이겠다고 한 것은 유대 제사장들과 율법주의자들로 뭉쳐진 ‘종교권력’이었고 빌라도는 그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가 이마에 땀을 흘려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와 이웃이 함께 수고해서 얻는 것이며 마지막은 이웃이 수고해서 얻은 것을 내가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나는 안 하고 네가 해서 얻은 것을 나도 나누어 가지자”라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유와 정의, 평등과 평화 역시 ‘악인 앞에 저항하는 의인’의 희생으로 얻고자 합니다. 물론 내가 ‘저항하는 의인’이 되는 것은 사양 합니다. 고난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수고로 딴 사과를 먹는 것은 내 선택이기에 안 먹어도 그만이겠지만, 의인이 불의 앞에 굴복한 부정한 역사 속에 사는 것은 내 선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본디오 빌라도의 ‘손씻음’의 결과를 오늘까지 우리가 먹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은 불의 앞에 굴복한 더러운 우물을 ‘마실 것’인가 ‘안 마실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 앞에 굴복한 ‘더러운 우물’을 마실 것인가 아니면 악인 앞에 저항 한 ‘깨끗한 샘물’을 마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역사의 우물과 샘을 마시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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