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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 2013

2013 사순절 이야기-36-소설 펀딩, 우리(내)가 바라는 세상은 공짜로 오지 않습니다\

지난 대선 문재인 대선 후보의 캠프에서 후원금 모집을 위한 구호에 제가 (내)라는 말만 덧붙여 보았습니다. 미국에 나와 공부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구하고자 하는 것이 정녕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인가. 지금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앞으로도 구할 수 없는 것일까? 차분히 생각해 보면 앞으로도 구하기 힘든 부분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 아닌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식구분들 대부분 비슷한 아쉬움이 있기에 이 머나먼 코네티컷 스토어즈에 옹기종기 모이게 된 듯 합니다. 하지만 같은 아쉬움이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도 계속 되길 바라지는 않을 듯 합니다. 보다 나은 사회,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은 많은 분들의 공통점 일테니까요.

우리가 바라는 세상 혹은 내가 바라는 세상 (*우리가 꼭 같은 세상을 바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에)에는 그런 아쉬움이 적었으면 합니다. 헌데 이런 세상이 그냥 저절로 오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그렇다고 딱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 경우가 대부분 인 듯 합니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 낮춰보면 실상은 많은 것들을 바꾸어 갈 수 있어 보입니다. 세상을 바꾸기는 힘들어도 세상에 작은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고, 그 작은 변화들이 큰 흐름들을 만들어 어느새 꿈꾸던 그 모습의 세상에 조금 더 가까워 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세상의 창이 되는 바른 언론 정론은 든든한 유료 구독자에서 나올 수 있고, 다양하고 풍요로운 문화지식산업은 건강한 문화지식소비자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굳이 모더니즘의 소외라는 개념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될지 안될지도 모를 이상향의 정론과 당장 매달 내야할 구독료는 꽤나 동 떨어져 보입니다. 내가 지불해야할 음원 사용료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데, 내가 바라는 풍성한 문화는 요원하게만 보이는게 사실입니다.

이런 구조적 문제를 참신한 아이디어로 해결해 보고자 하는 노력이 요즘 ‘소셜 펀딩 (social funding)’ 혹은 ‘크라우드 (crowd funding)’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해주로 자선활동, 이벤트 개최, 상품 개발 등을 목적으로 인터넷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다수의 개인들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것을 말합니다 (*’http://ko.wikipedia.org/wiki/소셜_펀딩’ 인용).

작년 10월에 한계레 신문은 ‘나 들’이란 월간지를 개간하였습니다. 이 제호는 평범한 개인인 ‘나’의 복수형으로 사람 중심의 저널리즘을 표방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내가 바라는 세상이 모여 만들어 진다고 봅니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세상의 나의 노력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꼭 크고 거창할 필요 없이 바로 우리 옆에 있는 누군가를 후원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후원이 많은 것으로 부터 소외되어 있는 우리들에게 참여와 연대 그리고 성취의 기쁨을 되찾게 해주길 기대해 봅니다.

텀블벅 https://tumblbug.com/ko/projects/popular

킥스타터http://www.kickstar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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