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제대로 된 신앙을 갖지 못한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신앙인(신앙을 본인의 삶에서 온전히 실천하고 사시는 분들)에게 감동했었던 몇 번의 경험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초짜(!)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준비해서 이야기가 길~어졌어요…)
이십대 중반, 프랑스 파리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할 때였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으나 가족을 떠나 혼자 생활하는 게 처음이라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으로 어린애나 다름이 없었던 데다가 다른 문화의 충격 속에서 아직은 언어도 서툴고, 자신감도 너무나 부족해 ‘아, 이러다가 정신병에 걸리게 되는 거구나…’ 싶을 만큼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우울한 유학 초기 시절을 겨우 넘어서고 있었다. 9월이 되어 석사과정이 시작되고 정신 없이 학업을 쫓아가던 때 그 전부터 알고 지냈던 Andre 할아버지의 소개로 세 분의 수녀님을 소개받았다: Violette, Mauricette, Mado. 1990년 당시 각각 78, 61, 57세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여인들(거리의 몸을 파는 여인들)에게 주님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녀들도 자신들과 똑같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인간이라는 걸 일깨워주는 것을 소명으로 하는 수녀단에 소속되어 계셨다. 파리 10구 성당 옆의 건물(전에는 수도원이었던) 중 3층에 있는 아파트를 임대해서 세 분이 생활하고 계셨다. 침실이 네 개여서 문화적, 종교적 다양성에 문을 연다는 의미로 방 한 개를 매우 저렴한 월세로 나에게 내어 주셨다. 당시까지 외로움에 절어 있던 나에게 세 분은 때로 친구처럼, 때론 따스한 엄마, 할머니의 역할을 해 주시면서 그렇게 우리는 2년 동안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다. 요일별로 저녁당번을 정해 요리를 하고, 함께 식사하고 매일 매일 있었던 일들을 함께 나누고… 그 분들 중 최연장자셨던 Violette 수녀님은 아픈 무릎에도 불구하고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에 정기적으로 나가셔서 봉사를 하셨고, 당시에도 회계업무 등 정식으로 일을 하셨던 Mauricette, Mado 수녀님도 일주일에 몇 번을 정해서 몸파는 여인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층의 여인들이 모여 있는 삐갈가의 골목에 나가셔서 길가에 있는 여인들과 친구로서 대화를 나누다 돌아오시곤 했다. 그 분들과의 생활에서 여러 모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생활 초기, Violette 수녀님과의 짧은 대화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느 날 낮에 둘이서 점심을 먹고 잠깐 TV를 보는데 아프리카의 고통 받고 있는 아이들의 장면이 나왔던 것 같다. 주름이 짙게 드리워졌지만 고운 자태와 어린아이같은 눈빛을 간직하셨던 Violette 수녀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프리카나 다른 오지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어떤 이가 평생 선하게 살았다면, 그 사람은 분명 천국에 갈 거라고 믿어.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도 정말 선한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고 살았다면 내가 믿는 우리 사랑의 하느님 눈에도 예쁘게 보일 거야. 분명히…” 난 Violette 수녀님 말씀이 참 좋았고 그 말씀을 하시면서 보여 주시던 진실된 미소가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우리 아파트 바로 아래층에 사시던 리듬체조 선수 출신의 오십대 아리따운 수녀님(안타깝게도 성함을 잊어버렸다)도 나에게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말씀을 해 주셨다. 그 수녀님이 속해 있는 수녀단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 적극적인 전도를 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고 있었다. 그 분도 아프리카에서 여러 해를, 미국에서도 얼마 동안 활동하시다가 빠리로 돌아오신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빠리 북쪽의 작은 수도원 안의 작은 아파트 안의 아주 작은 방,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며칠을 생활하시면 점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혀 와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빠리 근교의 넓은 공원을 찾아 가셔서 ‘숨을 쉬고’ 오셔야 했다. 그런 정기적인 산책들 중 한 번은 위층에 사는 잘 웃고 감동도 잘하고 겁도 많은 아시아 여학생(=나)과 함께 하셨다. 그 날은 참 하늘이 높았던 것 같다.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둥실둥실 떠다니고, 벵센느 공원 나무들의 초록도 짙어 터질 듯 했고, 또 왜 그리 크고 살찐 까마귀들은 많았는지… 아직도 날렵한 몸매를 간직한, 리듬체조 선수셨을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 모습에 짙은 주름 몇 가닥만이 지난 세월을 알려 주던 그 고운 수녀님은 벤치에 앉으셔서 처음으로 주님과 만났던 신비한 경험을 들려 주셨다. 그 후에 가게 된 이스라엘로의 성지 여행에서의 이야기도… “아프리카나 미국처럼 넓은 곳에 계시다가 빠리의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내시기 힘드시겠네요. 다시 떠나고 싶으신가요?”란 나의 질문에 예상과는 달리 이렇게 대답하셨다. “아니야. 난 이 곳에서 내 안을, 내 마음의 세계를 깊게, 넓게 만들고 싶어. 그래서 결국은 내 모습이 주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그 말씀이 참 간절하고 진실되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아주 최근에 내 앞에서 반짝이던 빛도 잊지 못할 감동의 순간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2010년 12월 28일 새벽 3시 반쯤, 195번 도로에서… 폭설로 인한 비행기 연기와 취소로 당황스러움과 두려움, 피곤에 절어 있던 우리 가족을, 생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생판 남인 우리들을 안내해 주시러 잠도 못 주무시고 그 새벽에 나오신 장호준 목사님. 사랑을 실천하기, 어떤 이들의 맘 속에 따스한 감동으로 기억되기를 생활화하고 계신 목사님. 정말 감동이었다.
이런 감동의 순간들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지금은 너무나 부족하고 너무나 멀리 있지만 현재의 순간, 순간 조금씩 더 노력하면서, 반성하면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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