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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5 2011

사순절 이야기 (24)

안녕하세요. 저는 다른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적어서 다른 분들과 같이 재미있는 말씀을 드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단지 제가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일은 음주가무에 뛰어났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그 잘하는 일 조차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음주가무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니 본 게시판의 성격에 맞지를 않아서 음주 가무 시 안주로 사용되는 군대 얘기를 포함하여, 제가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제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게 한 저의 경험에 대해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군대를 가기 전까지 제 삶의 의미에 대해 잘 몰랐으며,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삶의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고민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단지 ‘돈 많이 벌어야지’ 또는 ‘즐겁게 오래 살아야지’ 등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적인 목표만을 갖고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이 가물가물 하며, 그러한 목표조차 있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그러한 아메바가 갑자기 세포 분열을 일으키며 삶에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게 해준 계기는 군대 경험 중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사건 이후로 잊고 있었던 어릴 적 죽을 뻔 했던 일까지 생각이 나며, 내가 살아있는 이유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잠시 제가 죽을뻔했던 일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뭐 술 먹고 또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참고 들어주세요. –;;)

첫 번째 사건,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과 부모님 친구분들 가족과 함께 강가로 캠핑을 갔습니다. 그 강은 초등학생인 제가 놀기에 적절한 깊이였습니다. (한곳만 빼면….) 제가 깊은 곳에 빠지기 전까지는 그 강에 깊은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습니다. 물론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깊은 곳이 있을 거라 생각 하셨다면 아들이 어디 있는지 계속 주시 하셨을 건데 그 당시 저 혼자 그 깊은 강물 근처에 있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까지 수영을 배운 적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강물의 깊이를 알지 못한 채 강물로 뛰어들고 말았습니다. 근처에는 어른도 없으며, 내가 빠졌다고 알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나 아마도 물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소리를 질렀던 것 같습니다. 이대로 허우적대다가 죽을 수도 있었을 찰나에 문뜩 머릿속에 어떠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래 이 강은 얕은 강이야’ 하고 말입니다. 그때부터 몸부림을 멈추고, 숨을 참고 얕은 강이 나올 때까지 물속에서 걸었습니다. 그리고 얕은 강가로 걸어 나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계속 잊고 있다가 말씀드릴 군대에서의 사건 이후로 기억을 되살리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사건, 군생활을 적응할만한 때인 상병 여름 시절이었습니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취침에 들어있었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슬리퍼가 침상 바로 앞부분에서 둥둥 떠있었습니다.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막사 안에 물이 가득 차면서 악몽과 같은 그 날의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막사와 조그만 개울 사이에는 족구를 할만한 공간이 있었는데, 개울의 물이 너무 순식간에 불어나고 그물에 의해 막사 앞의 토사가 유출되기 시작했습니다. 막사가 무너질 수 있는 위험 때문에 모든 짐을 높은 지대에 있는 교회로 옮겨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온몸이 비에 젖어서 물건을 나르고 있는 찰나에 우리의 용감한 선임하사가 비닐하우스로 만든 체력단련장의 당구대를 꺼내오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체력단련 장으로 들어갔고 체력단련장의 당구대를 옮기는 순간 다행이 대대장님께서 지나가셨고, 구수한 욕설과 함께 저희를 막사 밖으로 나오라 명령하셨습니다. 모든 장병이 체력단련 장에서 나오자 마자 1분 후 순식간에 땅이 꺼지며 비닐하우스 체력단련 장은 강으로 떠내려갔습니다. 우리 모두 1분만 늦게 나왔다면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 (그날의 두 번째 사건), 저는 군대에서 155mm 견인포를 끌고 다니는 수송병이었습니다. 수송 분과장은 모든 일에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분과장 생각에는 모든 차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전체 포대 중 차량 4대가 가장 꺼내기 힘든 위치에 있었습니다. 원래는 차를 빼오는 길이 두 갈래가 있었는데 한 갈래 길은 벌써 폭우에 무너져서 사라진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차를 한 갈래 길로 빼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직접 운전하여 한대를 끌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차를 꺼내려고 가보니 남은 한 갈래 길마저 무너져 내려있었습니다. 저는 살아있고요…………

네 번째 사건, 그날의 마지막 사건은 역시 모든 공구를 꺼내오겠다는 우리 분과장의 투철한 장비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군부대와 같이 건물은 개울가 옆으로 나란히 지어져 있었습니다. 수송부 장비 창고 마져도…………. 다행히 그 수송부 장비 창고 앞 토담은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단지 토담위로 무서운 강줄기가 넘실대고 있을 뿐…..

분과장은 그 공구를 무조건 꺼내와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한마디 ‘혹시 저 토담이 무너지면 서로 일렬로 서있으면서 손을 잡아주자’ –;; 무식하면 용감한 겁니다……………

우리는 공구를 꺼내기 시작했고, 아침까지 부대 내 모든 담이 무너졌지만 그 토담만은 꿋꿋이 견뎌주었습니다. 그 폭우로 인해 주변의 많은 군인들이 죽었으나, 저희 부대는 한 사람의 사망자도 없이 잘 이겨내었으며, 그 일로인해 군단장이 직접 대대장에게 인명피해가 없이 일을 잘 마무리 했다고 칭찬을 들었다는 후문이 있었습니다. 그 후 강원도 내의 모든 길이 폐쇄되어 비축 식량만으로 며칠을 견뎌내었으며, 도로 보수가 시작되고 나가보니 개울 한복판에 다수의 다른 부대 차량이 떠내려온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저희 개울 건너편 부대는 폭우 시 산사태가 막사를 뒤덮어서 한 개 중대가 몰살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다섯 번째 사건, 당시 폭우로 인해 천삽 뜨기 운동 그리고 새벽별보기 운동과 같이 고된 진지공사에 들어갔습니다. 아침 기상과 동시에 삽을 들고 나와서 저녁 9시까지 헤드라이트를 켜고 진지 공사를 수행했습니다. 그때가 군생활 중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러던 중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땅이 딱딱해 지기 시작하자 모든 진지공사는 중단이 되었고, 봄에 이어서 공사를 진행하기로 되었습니다. 진지 공사 후 며칠이 지나 또 취침시간 중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전군 비상이 걸렸습니다. 정말 며칠 쉬지도 못했는데…. –;; 잠수함을 타고 간첩이 동해로 나타난 겁니다. 그날도 역시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급박한지 중부전선에 있는 우리 부대에서 동부전선에 차량 지원을 나가야 했습니다. 비는 장대같이 오고 배차된 차량은 오래된 차량이고 등등의 상황과 함께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습니다. 역시 중간 짬밥인 제가 지목되었고, 출장 준비를 서두르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막 군장을 다 싼 찰나에 본부로부터 저희보다 조금 더 가까운 부대에서 지원을 나가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날은 비상체제만 유지한 채 밤을 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소식은 저를 또 한번 놀라게 하는 충격이었습니다. 가까운 부대에서 출발하던 차량이 장대 같은 비와 나쁜 도로 사정으로 인해 차량 사고가 났으며, 그 운전자는 사망하였습니다.

이 모든 힘든 일을 겪고 나서 겨울이 오고 이제는 제 자신에 대해 돌이켜보고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중 문득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을 뭔가의 이유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를 현재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잘 모르지만, 살아가야 할 무슨 이유가 있는 저로서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만은 생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다짐이 기억력 감퇴와 함께 자주 잊어버려서 문제이긴 하나 그래도 내 삶의 목표를 항상 설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달려갈 수 있는 제가 되게 해준 아주 고마운 사건이었습니다.

옛 기억을 되짚어 보며 심취해서 글을 쓰고, 다시 제 글을 보니 갑자기 제 자신이 심히 반성됩니다. 술 먹을 때마다 이 긴 이야기를 하곤 했었구나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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