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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 2012

사순절 이야기 (24) – 고발 당했습니다.

몇일 전 오전에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던 중에 무전을 받았습니다.

“운행 끝나고 사무실로 와라”

사무실이라고 하는 곳은 그저 금요일에 주급 받을 때만 살짝 고개 들이밀고 얼른 주급 봉투만 빼가지고 나오면 딱 좋은 곳이지만, 아침부터 무전으로 불러대니 모른척하고 내 뺄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어쩔수 없이 사무실로 갔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디스패쳐인 베일리가 나를 보고는 ‘너 오늘 아침에 정지신호에서 우회전 했었어?’하고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각 주마다 도로교통법이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주에서는 정지신호 즉 빨간불에서 ‘빨간불 우회전 금지(No Turn on Red)’ 표지가 되어있지 않는 한 우회전을 할 수 있도록 되어있고 커네티컷 역시 같은 도로교통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스쿨버스의 경우는 별도의 도로교통법이 적용되는 지라 ‘빨간불 우회전 금지’표지의 유무에 상관없이 우회전을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가는 차가 한대도 없는 새벽시간에 마냥 신호 바뀔 때를 기다리고 있다보면 간혹 유혹에 빠지게 되고 그 유혹을 못 이겨 가끔은 빨간불에서 우회전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날 새벽 역시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를 세번쯤 외쳤어야 했던 것을 한 번만 슬쩍 웅얼거려보고는 잽싸게 우회전을 해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도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라고 말했듯이 나도 살면서 얻은 지혜 중 하나는 잘못을 하고 들켰을 경우는 즉시 잘못했다고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언젠가는 들통나게 되고, 그렇게 들통나고 나면 잘못한 행동보다는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묶여 사람대접을 못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해서 배운 지혜대로 베일리에게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했습니다.

“응, 우회전 했어”
그러자 베일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처다보더니 ‘하지마, 고발 들어왔어, 이거 들어봐’하면서 컴퓨터에 저장된 음성화일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베일리가 들려준 음성화일에는 익명의 남성이 ‘교통 고발 센터’에 고발한 내용이 담겨져있었습니다. 그 남성의 음성은 내가 빨간불 정지신호에서 우회전을 한 것부터 시작해서 약 20여분간 내 버스를 따라오면서 과속 한 것, 중앙선을 침범 한 것, 노란불 경고 신호에서 교차로를 건넌 것, 아이들과 장난을 하면서 불필요하게 브레이크를 몇차례 밟았던 것 그리고 아이들을 태운 후 급하게 출발 했던 것에 이르기까지 장소와 시간을 정확히 제시해가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상세하게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그 고발 내용을 들으면서 ‘도대체 어떤 녀석이길래, 그 새벽시간에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잘 것이지 …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거 아니라고 우겼더라면…’하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 했었습니다.

‘잘못 한 것을 잘못 했다’고 하는 것은 지혜라기 보다도 그저 상식입니다. 그것도 전문상식이 아니라 일반상식입니다. 하지만 최근 한국 상황을 보면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청와대 민간인 사찰에 연루된 어떤 자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웅변조로 우겼답니다. 하긴 대통령부터 그런 인물이니 그 수하에 있는 자들이야 뭐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리라는 것이 충분히 짐작되기는 하지만 이제 몇달 남지 않은 상황에서까지 아니라고 우기고 있는 것을 보면 저 인간이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보다는 ‘참, 저 짓을 하면서까지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구나’ 하는 생각에 오히려 측은지심이 발동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 이정희 대표의 총선불출마 선언은 ‘저 사람은 상식을 가지고 사는 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한 사건 이었습니다. 본인의 잘 잘못이나, 경선 규칙의 모순이라는 문제점을 떠나 당사자로서 또한 대표로서 책임을 짊어 질 줄아는 그리고 잘못을 즉각 시인하고 잘못 했다고 말 하는 상식적 행동이 오히려 감동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이번 총선부터 재외국민 투표가 시행됩니다. 나처럼 주소지가 없는 사람은 정당투표만 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정희가 대표로 있는 당에 표를 줘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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