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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 201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 아버지가 지어준 원래 이름은 “아브람” 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야훼가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바꿔 준 이후 그는 줄곧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사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분명치 않다. 다만 ‘그 아버지는 존귀하다’ 또는 ‘존귀한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을 바꾸면서 ‘모든 나라의 아버지’ 또는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야훼는 그의 이름을 바꿔주면서 이름에 걸 맞는 대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이 생길 것이다.’라는 약속을 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나이 팔십이 넘어서까지 자식이 없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인 사라가 자신의 젊은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들이게 한다. 하갈의 몸을 통해 자식을 얻으려는 의도였다.

의도는 적중했고 젊은 여종 하갈은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는다. 젊은 첩이 아들을 낳자 늙은 본부인의 박해가 시작된다. 갈등이 심화되어 갈 무렵 본부인 사라에게서도 이사악이라는 아들이 태어난다. 나이 구십에 아들을 낳은 사라는 더 이상 하갈이 필요치 않게 된다.

본부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녀에게서 난 아들 이스마엘을 내 쫓을 것을 요구한다. 성서의 설명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내 쫓는 문제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야훼가 ‘본부인 사라에게서 난 아들 이사악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이다.’라고 하면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 쫓으라고 했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빵 몇 조각과 물 한 부대를 하갈에게 던져 주고는 광야로 내 쫓아 버린다. 죽으라는 것이다. 살인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그것도 자기 자식과 그 자식을 낳은 여인을 죽이려 한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첫 번째 살인 시도였다.

아브라함은 야훼가 시키는 대로 했다. 아니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한다. 야훼의 뜻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책임이 없다고 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슬쩍 밀어 버린 것이다. 아니 당당하게 돌려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은 떳떳하다고 생각한다.

1750년대 남미 이구아수 폭포위에 자리 잡은 과라니 원주민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도를 받아들여 선교 자치 공동체를 만든다. 하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정책 사이에 끼인 교회의 추악한 정치 놀음에 선교구역은 폐쇄되고 이에 저항 하던 선교사들과 원주민들은 처참하게 몰살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The Mission” 이라는 영화에서는 과라니 족의 족장과 로마 교황청 대사간의 대화 장면이 등장한다.

선교 자치 공동체 폐쇄를 명령하는 로마교황청의 대사에게 과라니 족장이 묻는다.

“왜 우리가 공동체를 폐쇄하고 정글로 돌아가야 하느냐?”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정글에 살 때는 하나님이 이곳에 공동체를 만들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정글에서 나와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 곳을 폐쇄하고 다시 정글로 돌아가라고 한다. 왜 하나님의 마음이 변했는지 이해 할 수 없다.”
“나도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럼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포르투갈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냐?”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대신 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상도구인 교회를 대표해서 말하는 것이다.”
“왜 포르투갈 왕에게 직접 말 하지 않느냐?”
“왕에게 말하려 했지만 듣지 않았다.”
“나도 과라니의 왕이다 그러니 교황 사절인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다. 우리 땅을 빼앗겠다고 하면 우리는 싸울 것이다.”

총과 대포를 앞세운 군대의 공격에 과라니족과 선교사들은 처참히 죽고 선교 자치 공동체는 폐쇄를 당하고 만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뜻이 “해방신학”을 태어나게 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리도 많은 피를 흘려야만 자신의 뜻을 나타낼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 아니 그건 하나님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탈을 뒤집어 쓴 더러운 교회의 정치 놀음일 뿐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책임을 야훼의 이름에 떠 넘겨 버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죽음으로 내 몰아버렸지만 죽음 앞에서 울부짖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하나님은 그대로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죽음의 광야에서 살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세운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죽음으로 내 몰아버린 아브라함에게 이번에는 야훼가 그의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아니 바치라고 했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야훼의 명령에 따라 이사악을 제단에 눕혀놓고 이사악의 가슴에 칼을 꽂으려 한다. 아브라함의 두 번째 살인 시도였다.

야훼의 명령이라고 했다. 야훼의 명령이면 무엇이든 따라야 한다고 했다. 아들을 죽이는 일이라도 서슴없이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하나님의 개입으로 아브라함의 두 번째 살인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살해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야훼의 명령을 지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죽이려 했던 하갈과 이스마엘을 하나님이 살렸다. 이스마엘은 아랍민족의 조상이 된다. 아브라함이 죽이려 했던 이사악을 하나님이 살렸다. 이사악은 유대민족의 조상이 된다. 아브라함이 잘못 끼운 첫 단추는 사천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두 아들들의 후손들이 서로를 죽이며 싸우고 있게 만든다.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두 번에 걸쳐 살인 미수를 저지른 아브라함, 그를 기독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받아야 한다고 한다, 따라 해야 한다고 한다. 아브라함처럼 믿어야 한다고 한다. 아브라함 처럼 하갈과 이스마엘을 죽음으로 내 몰아야하고 아브라함처럼 이사악을 제물로 죽여야 한다고 한다.

두 번씩이나 살인 미수를 저지르고도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간구하기는커녕 야훼의 뜻이라고 핑계를 대며 책임을 떠넘기는 아브라함처럼 믿어야 한다고 한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야훼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식들을 두 번씩이나 죽이려 했던 미친 노인네가 ‘믿음의 조상’이 된 이래 기독교는 야훼의 이름이라면 못할 짓이 없었다. 그 결과 야훼의 뜻이라는 명분아래 사람을 죽이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한다. 자기 자식도 죽이는 판에 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야훼의 명령이라는 명분으로 이교도를 죽이는 일은 너무도 당연하고 당당한 행동이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여인들과 어린이들까지 도륙하는 행위는 지극히 기독교적인 믿음의 자랑스러운 행위였다.

기독교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역사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를 끼울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교회는 멀쩡한 옷에 단추 구멍을 억지로 뚫고 있다.

기독교는 ‘믿음의 조상’이 잘못 설정 되었다. 잘못 설정된 ‘믿음의 조상’을 그대로 받아온 많은 한국 기독교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해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삼일절에 시청 앞 광장에서 성조기를 흔들며 북한 타도를 서슴없이 외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아니다. 이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건 그저 이권을 챙기려는 교회들의 추잡한 이전투구일 뿐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은 잘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지는 알 수 있다.
죽임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미움은 하나님이 뜻이 아니다.
분열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살림이 하나님의 뜻이며.
평화가 하나님의 뜻이며,
사랑이 하나님의 뜻이며,
통일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한국 기독교는 잘못 설정된 ‘믿음의 조상’을 바꿔야 한다.

야훼의 뜻이라면 죽임도 전쟁도 분열도 서슴없이 저지르게 만드는 광신도 아브라함은 더 이상 한국 기독교의 ‘믿음의 조상’이 아니다. 우리민족 기독교의 ‘믿음의 조상’은 민족을 살리는 평화 통일의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 놓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너, 믿음의 조상이 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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