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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 2011

사순절 이야기 (39) – 고통 그리고 공감

어제 연수 언니가 쓴 고통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아~ 이것도 좋은 글의 주제가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침부터 극심한 감기몸살로 침대에 누워 힘들어하는 남편의 고통을 보면서… 문득 과연 나는 저 사람의 고통을 얼마만큼 공감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에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난 주 예배 시간에 말씀드린 자신의 고통에 촛점을 두는 것보다 타인의 고통에 초점을 두는 것이 도움 행동을 더 잘 유발시킨다…. 기억하시나요? 그 타인의 고통에 초점을 두는 것이 바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겠지요. 그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타인의 고통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을 까요?

첫번째는, 수동적인 공감의 위험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현대인들은 수동적인 공감을 많이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소설책이나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의 삶에 공감하고 함께 기뻐하고, 가슴 설레이기도하며, 슬퍼하는 것 재미있잖아요^^

하지만 문제점도 있지요. 예를 들어 유콘 여자 농구가 안타깝게 패하던 그 경기에서 우리편 선수가 상대편 선수에게 드리볼 하던 공을 빼았긴 장면을 보았다고 상상해보세요. 공을 빼았기는 순간 안타까움에 나도 모르게 신음하며 탄성을 질렀겠지요. 그 순간 나는 그녀에게 공감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 누구도 직접적인 도움을 유콘 선수들에게 줄 수 없지요. 감정적으로는 안타깝다고 느끼지만 행동으로 도와 줄 수 없기 때문에 적당히 느끼고 마는 수동적인 공감에 빠져있게 되는 것이지요.

둘째, 타인의 고통을 공감한 결과가 자신의 내부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타인의 고통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신에게도 고통스럽습니다. 아픈 아이들이 나오는 방송을 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 지면서 채널을 돌리게 되는데요… 자연스러운거지요.

일전에 중학교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폐휴지를 수합하며 살아가는 할머니들의 삶에 대한 영상을 보고 소감을 적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 계층, 나이가 다른 할머니를 중2남학생이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과제였는데요. 제 예상보다 아이들은 집중하며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 소감문을 공개합니다.

(1) 힘들어 보인다. 나니까지 드셨는데 그 무거운 리어카를 들고 게다가 하루 종일 고생한 대가가 3천원이라니 (—) 할머니를 보고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노후 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 집에 가는 길에 할머니들이 유모차를 밀면서 종이나 병을 모으는 것을 자주 보았다. 난 그냔 할일 없어서 쓰레기를 줍는 구나 생각했는데 이 영상을 보고 저런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커서 부모님을 왕처럼 모시고 살아야 겠다.

(3)어느날 길을 가는데 꼬부랑 할머니가 리어카를 끌고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힘겨운 모습에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누군가 도와드리겠지 내가 나설 필요는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날씨도 추운데 할머니의 리어카는 너무 무거워 보여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다른 것은 못해드렸지만 대신 리어카는 끌어주었다.

과연 (1), (2), (3)번 중에 누구를 진정으로 타인의 슬픔에 공감했다고 볼 수 있을 까요?  당연히 (3)번이겠지요.  힘없고 돈없는 노인을 보고 고통을 느끼면서 자신의 노후대책을 세우고 부모님을 잘 모셔야 겠다고 소감을 적은 아이들과 슬픈 할머니의 모습 그 자체에 마음이 아파서 행동으로 나아간 아이의 자세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저의 이러한 이론을 중심으로 오늘 저의 마음을 반성해본 결과는 별로 좋지 않네요….타인의 슬픔에 진실되게 공감한다는 것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 자신의 슬픔을 타인이 어설프게 이해할 수 있지만 완전하게 공감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외롭고 또 그 허전한 마음에 신을 요청하는 것이 아닐까요? 기도하면서 얻게 되는 그 많은 위안들 모두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에 공감해 주셔서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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