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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 2011

사순절 이야기 (38) – 고통

내 얘기를 할까, 남 얘기를 할까, 외계인 얘기를 할까 등등 고민하다가 사순절이니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한국의 정치역사에 있어서 매 정권마다 한번씩 언급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고통분담’. 때로는 국민에게 나라의 고통을 분담해달라고 설득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민의 고통을 정부나 혹은 다른 이익집단이 분담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렇다고 고통이 씻은듯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 분담하자고 하는걸보니 고통이라는 것이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맞는가봅니다.

살다보면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얍삽한 사람, 순진한 사람, 특이한 사람,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곤하지요. 특히 저는 사람, 관계, 감정을 전공하다보니, 직업병처럼 사람들의 세포하나하나 움직임까지 느껴질때가 많습니다. 만남이란것이 때로는 그냥 내 일상의 한부분으로 스쳐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깊고 신뢰로운 관계로, 때로는 아픈 손가락처럼 남기도 합니다. 특히 인간 관계에 있어서 배신이란 상상할수 없을 정도의 고통입니다.

고통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물리적 손상에 의한 신경학적 의미의 감각적 고통도 있지만, 대개는 실제적 피해 등으로 인한 폭넓은 감정적 불쾌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재미난 고통의 의미 중 하나는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잠재적인 위험 상황으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하며, 손상된 신체부위가 회복될 때까지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회피할 수 있기 한다.’ 즉, 때로 고통이 더 큰 위험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신경학적 심리학적 방어 메커니즘을 형성해주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그의 짧은 인생동안 여러번의 배신을 당하게 되지요. 특히 그의 처형은 유다의 배신, 유대인들의 배신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뭐 단지 배신행위때문이었겠습니까마는, 어쨌든 예수는실정법상 반역죄, 뭐 쉽게 말하자면 국가보안법 위반, 국가 전복을 꾀하고 민중을 선동하는 반국가 수괴였을겝니다. 당연히 반역죄는처형으로 다스려졌겠지요. 단지 그가 사랑했던 그리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 그에겐 어떤 고통이었을까. 그는 왜 분노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돌을 맞으며 느끼는 고통은 어떠했을까. 뜨악입니다.

하지만, 그가 주는 최고의 감동은 바로 마지막 그의 말씀에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까닭은 저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함이 아니고 내 기쁨이 저들안에 가득하기 위함이다.” 그의 일관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에 어찌 감동받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이제 부활절이 몇일 남지 않았네요. 듣기만해도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고통이나 수난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제 기쁨과 소생의 의미(Lent)로 바꿔보심이 어떠하실런지요. 믿건 믿지 않건, 고통이건 아니건간에 그의 말씀에는 가슴에 남는 열정과 아름다움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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