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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8 2014

사순절 이야기-30 “부석사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 전날, 친분이 있는 어느 신부님으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타지 생활에 움츠러들지 말고 소처럼 우직하게 가야 한다는 조언이 담긴 고마운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글 끝자리엔 도종환 시인의 시 한 편이 놓여 있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들을 산줄기에 뒷산 숲에 바람에 모두 나누어 주고, 그렇게 담백하게 욕심을 버리고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저에겐 아직 뒤죽박죽 엉켜 있는 실타래처럼 풀기 힘든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순절 기간을 맞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 예수님을 괴롭혔을 온갖 번뇌들을 생각하면서, 그 어지러운 마음을 이 시 한편으로 대신 나누고자 합니다.

“부석사에서”
-도종환

오백년 천년을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가슴께에 칠해진 어지러운 원색의 빛깔들
여름이면 바다처럼 펼쳐진 산줄기에 나누어주고
가을이면 새빨간 빛깔들 뒷산 숲에 던져주고
나머지 짙게 덧칠해진 단청빛마저 마음에 걸려
바람에 던져주고 하늘에 풀어주고
세월 속에 가장 때묻지 않은 얼굴빛으로 엷어져
본래 제가 지녔던 나무 빛깔로 돌아오며 겸허해지고
담백하게 욕심을 벗어 더욱 굳세어지고
그렇게 버리면서 육백년을 지나왔으리니

백년도 백년의 절반도 다 못 살면서
더 화려하고 더 강렬한 빛깔을 지니고자
더 큰 목소리와 더욱 다단한 기둥을 거느리고자
기를 쓰다가 허세부리다가
우리들은 사바세상 티끌과 먼지로 사라지나니
진정 오래오래 사는 길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요란한 파격은 애당초 마음에 두지 않았던
맞배지붕은 보여주고 있나니
동안거 끝내고 마악 문 앞에 나와 선 듯한
무량수전 기둥은 말하고 있나니
돌축대 위에서 좌탈하고 앉아 있는
안양루로 가르쳐주고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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