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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 2009

모어와 모국어

한국어 교실 준비하다가 우연히 읽은 오래된 기사.
결핍을 통한 결실을 보여주는 재일한국인의 글.

[ddet ]
“어느 백인 남성의 질문”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베를린의 하룻밤

머물고 있는 뒤셀도르프에서 베를린으로 사흘간의 짧은 여행을 떠났다. 내가 처음 베를린을 방문한 것은 1983년이다. 물론 아직 동서로 분단돼 있던 시대였다. 그 이후 스무 번 넘게 이 도시를 찾았을 것이다. 나는 베를린을 좋아한다. 그 첫번째 이유는 미술관, 두번째는 오페라와 음악, 세번째는 동물원, 특히 보노보나 고릴라는 아무리 봐도 싫증나지 않는다. 거기에 크로이츠베르크의 터키인 거리에서 먹는 감미로운 터키요리도 보태야겠다. 하지만 내 마음을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은 이 도시에 가면 역사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 동서분단과 냉전, 그런 현대사의 통절한 기억이 베를린 도처에 노출돼 있다. 이 도시 자체가 현대사의 생채기인 것이다.

이번 베를린 방문의 목적은 재독 동포와 독일시민이 결성한 ‘Korea Verband’(코리아협의회)라는 단체가 주최하는 자그마한 모임에서 강연하는 일이다. 나는 주로 사용하는 언어가 일본어고 직장도 일본에 있어 우인이나 지인 대다수가 일본인이다. 지금까지 독일에 초청해준 것도 쾰른의 일본문화회관이고 그 때문에 독일 각지에서 강연했을 때도 청중의 대부분은 ‘일본’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얘기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없다는 아쉬움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번 강연회는 내겐 정말 고마운 기획이었다. 강연회장은 옛 동베를린쪽의 학케셰르마르크트 역에 가까운 화랑이다. 그 일대는 예전엔 유명한 유대인 거리였으나 나치의 대두와 함께 그 거리 유대인들이 쫓겨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당해 지금은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동서독 통일 뒤 거리는 재개발돼 이젠 젊은이와 아티스트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됐다.

좁은 화랑에 주최자의 예상보다 많은 청중이 모였다. 참석한 재독 동포는 여성이 많아 물어봤더니 60~70년대에 간호사로 독일에 온 사람들이었다. 같은 시대에 탄광 광부로 온 남성들과 함께 문화도 생활습관도 다른 나라에서 열심히 일해 그 수입의 대부분을 고국에 송금했다. 이 사람들은 한국의 개발독재정권이 펼쳐온 ‘인력수출’ 정책의 산증인들이다.

강연 제목은 ‘디아스포라와 언어’. 조선어로 강연하고 젊은 재독 동포여성이 독일어로 통역했다. 5살 때 양친과 함께 독일에 왔다는 그 여성은 역시 조선어를 독일어로 통역하는 건 자신이 있으나 독일어를 조선어로 통역하는 데는 그다지 자신없어 했다.

이 지면에 강연 내용을 자세히 쓸 수는 없다. 아주 간단히 요약해보겠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결과 일본어를 모어로 해서 자란 재일 조선인 2세 입장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

‘모어’와 ‘모국어’를 구별하고 ‘모국어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모어의 권리’도 옹호해야 한다. 그것이 한 국가나 사회속의 언어 소수자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며, 동시에 그 국가가 편협한 내셔널리즘으로 전락하는 걸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재일 조선인이나 재독 동포 등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조선민족이 경험한 식민지지배, 전쟁, 냉전과 민족분단이라는 근현대사 과정에서 세계로 이산하게 됐다. 그 2세와 3세는 조선어와 조선문화를 잃어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민족’이라는 틀 바깥으로 사라져가는 존재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조선어도 조선문화도 모르는 너희들은 이미 조선인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선문화’라는 걸 갖고 있는 사람이면 ‘조선인’이라는 게 아니라, 조선인인 우리가 자기표명을 할 때 그것이 조선문화가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와 같은 좁은 틀을 벗어나 코리안 디아스포라도 포함한 더 넓고 유연한 ‘민족’의 틀을 구상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식민지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자기 문화를 표명해야 하며, 거기에 자신을 가져야 한다. 식민지지배를 받은 통한의 역사를 지닌 우리는 그럴수록 자기중심적인 내셔널리즘을 뛰어넘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그 어려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 디아스포라가 수행해야 할 역할은 크다.

통역 포함해 90분 정도의 강연을 마치고 질의응답에 들어갔다. 좋은 질문이 많이 나왔으나 그 가운데서도 목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초로의 한 백인 남성이 이런 질문을 했다. “나는 중남미 칠레에 체류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선 동유럽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2, 3세대를 거치면서 ‘칠레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갖게 됐다. 아이덴티티라는 건 타자와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식민지지배나 차별과는 무관한 것 아닌가?”

일본정부가 이 의견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기뻐했을 것이다. 일본정부는 일관되게 재일 조선인이 모두 동화돼서 재일 조선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소멸되기를 고대해왔다. 그렇게 돼야 식민지지배라는 죄과를 증언할 산증인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므로.

다음은 내가 한 대답이다. “아이덴티티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겨난다는 건 맞지만, 실제로는 어떤 타자와의 관계에도 권력관계가 보이지 않게 작용한다. 식민지지배자와 피지배자, 여자와 남자, 아이와 어른, 소수자와 다수자, 모두 그렇다. 그것을 무시하고 마치 순수하게 대등한 관계가 존재하는 듯한 전제를 까는 건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중남미의 예를 든다면 거기서 상기해야 할 제1의 타자는 원주민이 돼야 한다. 원주민들은 재일 조선인이 그런 것처럼 지금도 ‘나는 누군가’라는 질문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남자는 다른 독일인 청중에게 “내 처는 코리안인데,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모두 내가 가르쳐주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그것을 듣는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것이야말로 식민주의다!” 즐겁고 의미있는 하룻밤이었지만 숙소로 돌아오는 내 가슴은 떨쳐버릴 수 없는 분노로 가득찼다.

번역/한승동 선임기자, 2006, 8, 24,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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